<살아요> 단 하루도 쉽지 않았지만_On Living

<살아요> 단 하루도 쉽지 않았지만_On Living

2020. 6. 18. 22:38자기계발서적

호스피스 채플런 Hospice Chaplain 호스피스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는 사람입니다. 즉 죽어가는 사람들의 인생에 마지막 힘이 되어 주는 사람입니다. 다양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삶의 끝을 앞두고 후회와 두려움을 얘기할 때, 때로는 기쁨을 가져다준 경험을 이야기할 때 옆에서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종교나 신념, 문화에 관계없이 영적인 조언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삶의 마지막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들이 제공하는 영적 케어는 환자들 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마음에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합니다. 

 

<살아요>, 책의 저자인 케이 이건은 하버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첫 아이를 출산 시 투여한 진통제의 부작용으로 몇 달간 환각, 망상, 자살충동, 정신분열 등의 정신질환 증세를 겪었고, 완치 후에도 트라우마로 인해 오랜 시간 깊은 우울감과 상실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호스피스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는 채플런(Chaplain)으로 일하며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목차

삶의 끝에서 글로리아가 말했다
가족"가족은 모든 것의 시작이에요. 그들을 미워했어도 마찬가지죠."
비밀"내가 최고로 잘한 일인데, 남들이 손가락질할까 봐 평생 입을 다물고 살았어요."
"다시 젊어진다면요? 당연히 춤을 더 많이 춰야죠."
희망"가장 좋은 건 마지막 순간에 오기도 해요."
회색 지대"세상에 흑과 백만 있는 것 같아요?"
상실"아기가 떠나도 나는 영원히 엄마일 거예요. 내가 받은 선물이죠."
변화"늘 기도해요.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겸허함, 그리고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믿음"진짜냐고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죠."
사랑"아무도 다 큰 어른에게 사랑을 쏟지 않아요. 근데 알아요? 나이가 들수록 사랑은 더 많이 필요하답니다."
고통"모두가 좋은 것만 변한다고 생각하죠. 그게 문제예요. 슬픔도, 고통도 모두 변해요."
죽음"죽음? 특별할 거 없어요. 인생에서 하는 일 중 하나일 뿐이지. 섹스처럼"
"아름다운 삶이었고, 그다음에는 떠나는 거예요."
감사의 글

 

목차를 읽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찡해집니다. 우리는 모두 제한된 시간의 삶을 삽니다. 누구나 죽죠. 죽어가는 것도 삶의 일부입니다. 만약 제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면, 저 역시도 죽는 순간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황금같은 시간 시간마다 고통 속에 몸부림칠 것 같아요. 이럴 때 누군가 얘기를 들어주고, 손 한 번이라도 잡아준다면 삶의 끝으로 가는 과정이 조금은 편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다음은 제 마음에 와 닿았던,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후회는 창문이다. 그것은 바라지 않았던 기회이며, 불편한 자극이고,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 보라는 고통스러운 격려이다. 당신이 받아들인다면 후회는 희망의 매개체가 될수있다.
이를 위해서는 후회한다는 사실을 우선 인정해야 한다. 인생에서 무엇이 달라지기를 바라는지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햇빛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삶에서 겪는 상실은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변하게 한다. 이를 피할 길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이전에 무언가를 가졌었다는 사실 자체를 변하게 하지는 않는다. 두 아이를 잃었다고 해서, 엄마가 되었었고 영원히 엄마로 남는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뇌졸중 환자가 언어 능력을 잃었다고 해서 그가 아버지이자 남편, 변호사이자 피아노 연주자로서 살았던 삶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이따금 상실의 고통이 너무 커서 억센 껍데기를 뒤집어쓰는 것만이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껍데기가 너무 두꺼워 자신조차 스스로를 알아보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곳에 존재한다. 우리의 본모습은 그 안에 그대로 있다. 그저 보이지 않게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내가 병들었던 시절, 그리고 그 후로 아주 여러 해 동안 나는 간절히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 일이 있기 전의 나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때의 나라는 사람이 그리웠다. 그 사람의 정신, 그 사람의 몸, 그 사람의 영적인 삶, 자신과 세상에 대한 그 자신감이 그리웠다. 그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사람이 영영 사라진 줄 알았다. 지워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의 내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변화해야 한다. 누군가 그것을 알아보든 못 알아보든 마찬가지다. 자신이 한때 어떤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저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나는 과거를 너무나도 간절히 바꾸고자 했지만, 그건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시간을 되돌려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없다. 과거를 바꿀 수 없고, 과거의 자신도 바꿀 수 없다.
나는 이미 일어난 일을 단 하나도 바꿀 수 없었다.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 일을 바라보는 시각뿐이었다.
세상을 보는 시각과 자신에 대한 이해의 변화로 인해, 자신이 잘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구원받은 사람임을 깨닫는 것이다. 세상이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나뭇잎은 언제나 초록색이었다. 다만 그들이 그 초록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했던 것뿐이다. 숱한 햇살이 평생 그들의 피부에 내려앉았다. 그들이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누군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아직도 고통스러워서 그럴 것이다. 그 누구도 고통이 무슨 의미인지, 거기에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지 판단해 주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신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주지 않는다거나 신에게 나름의 계획이 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누군가의 고통에 더 큰 목적이 있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정말로 그러한지는 그들 자신만이 판단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이야기할 때 앉아서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말없이 함께 앉아 있어 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반복하며 이리저리 돌려 볼 때면, 거기서 의미를 찾거나 만들어 내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의미는 직접 찾아야 한다. 그 과정이 비로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피할 수 없다. 남이 아무리 사려 깊은 조언을 해주거나 위로를 내놓아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직접 찾는 의미는 남이 찾아 주는 것과 결코 같은 수 없다. 스스로 찾아내는 의미는 항상 더 풍부하고 미묘한 차이를 가지며, 더 경이롭다.

 

당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노력해야 한다. 나중으로 미루면 안된다. 기다린다고 해서 더 쉬워지지 않을 것이며, 남은 시간은 짧으니까.

 

"자신에게 약속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멋진 삶을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