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전 임무, 지금 수행합니다. 영화 <암살>

16년전 임무, 지금 수행합니다. 영화 <암살>

2020. 8. 13. 17:49영화

 

5년전인 2015년 개봉작인 영화 <암살>입니다.

영화 ‘암살’은 1930년대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독립군과 임시정부대원 그리고 그들을 쫓는 청부살인업자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그렸습니다.

<암살>은 제가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 중 감동과 재미를 느꼈다고 생각되는 몇 안되는 작품입니다. 지금 개봉해도 천만 관객은 쉽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다시 봐도 재미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시나리오와 빈틈없는 배우들 연기 덕분입니다. 

저는 아래 스틸컷을 볼 때마다 이들의 최후를 알기 때문인지, 그 어렴풋한 미소가 너무나 짠해서 항상 코끝이 찡해옵니다. 후손들에게 독립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치열하게 싸우며 이름 하나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희생하셨을까요. 지금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잊혀진 영웅들 그리고 이런 역사를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영화 <암살> 스틸컷

 

평소 영화 <암살>의 주연 여배우에 대한 호불호가 딱히 없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그 캐릭터의 인생에 제가 지나치게 몰입할 수 있을 정도로 여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관련 인터뷰 중, 딱히 역사의식 없이 연기만 했을 뿐임을 암시하는 발언을 보고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어쨋든 여배우가 연기한 여자 독립군 '안옥윤'은 독립운동가인 실존 인물 '남자현' 열사를 모티브로 했다고 합니다.

 

영화 <암살>중에서 '안옥윤'

 

 

EBS '다큐프라임 - 또 하나의 독립운동'


남자현 열사는 1872년 12월 7일 경북 안동에서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고 합니다. 19세에 결혼을 하였으나, 1896년 남편은 의병활동을 하던 중 왜군과 전투 중 전사했습니다.
남자현 열사가 46세 되던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9일에 아들과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관할하의 서간도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시작합니다. 여성 계몽, 여권신장에도 주력했습니다.

1925년 11월 23일 조선총독(齊藤實)을 주살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32년 6월‘만주사변(滿洲事變)’의 원인과 중국 ·만주의 여러 문제를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던 국제연맹조사단에  '朝鮮獨立願'(조선독립원,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이라고 쓴 흰 천에 잘라낸 왼손 무명지 2절을 함께 싸서 보내 독립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남자현 열사는 여자 안중근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1933년 소위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를 제거하기 위해 장춘으로 가던 중 밀정의 고발로 일본 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히며 유치장에 감금됩니다.
6개월 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 그리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 투쟁으로 같은 해 8월 사경을 헤매게 되어 보석 석방됩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며 순국전에 아들에게 248원을 건네면서 “조선이 독립을 하게 되면 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전달하라.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 8월 향년 61세의 나이로 남자현 열사는 순국했습니다.

남자현 열사께서 아들에게 남긴 독립축하금은 1946년 3‧1절 기념식 때 만주화폐 200원과 조선은행권 200엔을 설명서와 동봉, 김구 선생에게 드렸다고 합니다.


 

영화 <암살> 중에서

 

 

 


영화 <암살>의 최동훈 감독 인터뷰 중에서



“실제로 독립군 이야기를 품게 된 건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의 책 때문이다. 나 같은 범인들은 갖지 못한 어떤 위대함이 느껴졌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그들도 평범한 사람이었겠지만 결단이나 행동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걸 영화에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역사문제에 있어서 일본이 제대로 된 사과를 안 하고 있잖나. 나도 한국 사람이니 불만이 있다. 또 국내 역사교육도 부실해지는 것 같고. 어떤 나라건 자국의 역사교육은 중요하다. 집밥을 먹는 것과 비슷한데 그걸 잘 안 챙기고 있다. 거기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친일파에 대한 매듭을 못 지었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찌꺼기가 남아 있잖나. 그런 눈으로 1930년대를 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역사를 잊지 않고 이런 영화를 꾸준히 기획하고 제작하는 분들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